5일(현지 시간) 메르츠 총리(왼쪽)과 트럼프 대통령. 사진 출처 메르츠 총리 인스타그램
기자회견을 두고 독일에서는 어떤 반응이 나왔을까. 독일 언론들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는 평가를 내렸다. 메르츠 총리 역시 독일 방송 ZDF에 “매우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세계 정상들은 이제 트럼프와의 만남을 어떻게 ‘관리’할지, 또는 최소한 ‘버텨낼지’를 배우고 있다”고 전했다. 미독 정상회담의 막전막후를 살펴봤다.
● 하나의 핵심 메시지를 전달해라
5일 백악관 기자회견에서 메르츠 총리. 워싱턴=AP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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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메르츠 총리에게 발언권을 넘겼다. 메르츠 총리는 약 48초의 간략한 감사 인사를 전했다. 1982년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당시에 처음 백악관에 방문했다며 개인적 인연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독일과 미국은 역사적 접점이 많고, 우리는 미국에 크게 신세를 졌다. 이 점을 절대 잊지 않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질의응답에 들어갔다.
5일 메르츠 총리(왼쪽)와 트럼프 대통령. 워싱턴=AP 뉴시스
메르츠 총리는 모두발언에서 우크라이나 전쟁 문제를 강조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이어진 질의응답을 기회로 활용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어떤 식의 전략을 쓰는 것이라고 보냐’는 질문에 트럼프 대통령이 답한 후 메르츠 총리에게 “말씀을 하시겠냐”며 발언권을 돌렸다.
그러자 준비한 핵심 메시지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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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트럼프 대통령은 “당신들에겐 별로 기쁜 날이 아니었죠?”라고 반문했다. 메르츠 총리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장기적으로 보면, 이 날은 나치 독재로부터 우리 나라를 해방시킨 날입니다.”
그러면서 이번에도 “미국이 전쟁을 끝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유럽연합은 우크라이나를 지지하고, 러시아를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 미국이 우리와 어떻게 협력할 수 있을지 이야기하자”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의논해봅시다”라고 화답했다.
5일 메르츠 총리와 트럼프 대통령. 워싱턴=AP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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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럼프의 WWE 스타일 기자회견
CNN은 지난달 21일 트럼프 대통령이 백인 남아프리카공화국 농민들이 집단학살의 희생자라는 허위 주장으로 시릴 라마포사 남아공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훈계하자 “트럼프는 기자회견을 마치 WWE(종합격투기) 경기처럼 운영한다”고 분석했다. 백악관 기자회견이 어떤 예상치 못한 방식의 공격이 들어올지 모르는 거친 싸움으로 비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올 2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사례를 볼 때, 트럼프 대통령만 공격을 날리는 것이 아니다. 회견에 배석하는 J D 밴스 부통령과 마가 성향 언론인도 기회를 노리다 거침없이 파고들곤 한다.
영국의 키어 스타머 총리가 올 2월 백악관을 찾았을 때도 그랬다. 밴스 부통령은 “영국이 미국 기업을 억압하며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에 스타머 총리는 “영국은 오랫동안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며 간결하게 반박했다. CNN은 “스타머가 매주 수요일 낮12시 하원에서 총리가 30분간 질의응답을 하는 ‘PMQ(Prime Minister’s Question time)’를 통해 단련된 정치인의 면모를 보였다”고 평가했다.
오찬 도중 영어로 “이탈리아가 국방비를 증액하고 있다”고 언급하는 멜로니 총리. 워싱턴=AP 뉴시스
CNBC는 “오벌 오피스에서의 갈등을 피했다는 것 자체가 요즘엔 성과라고 볼 수 있다”고 전했다.
● “말을 많이 할 필요도 없다. 그가 말하게 두라”
트럼프 대통령과의 껄끄러운 관계를 균형감 있게 다룬 정상도 있다. 캐나다의 마크 카니 총리다. 카니 총리는 캐나다의 미국 병합을 요구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51번째 주’ 발언을 비판하며 당선됐다. 이에 지난달 백악관 방문을 앞두고 여러 자문을 받으며 꼼꼼히 준비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 정치매체 폴리티코에 따르면 한 인사는 카니 총리에게 “트럼프와 이야기할 땐 핵심 문장을 1, 2개 준비해서 어떻게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말을 많이 할 필요도 없다. 그가 말하게 두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카니 총리는 이 조언을 그대로 따랐다. 준비한 핵심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연습했다고 한다.
회담 당일 카니 총리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말을 경청했다. 그러나 그의 손짓에서 초조함이 묻어났다. 트럼프 대통령의 말이 끝나간다 싶을 때마다 발언권을 구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카니 총리(왼쪽)와 트럼프 대통령. 워싱턴=AP 뉴시스
“세상에는 결코 매물로 나올 수 없는 곳들이 있습니다. 선거 기간 동안 저는 캐나다의 주인들을 만나봤습니다. 캐나다는 지금도, 앞으로도 절대 매물로 나오지 않을 겁니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은 “절대란 말은 하지 마세요”라고 말했다. 카니 총리는 정면으로 응수하지 않았지만 손놓고 있지도 않았다. 영국 가디언은 카니 총리가 카메라를 바라보며 입모양으로 “절대, 절대, 절대, 절대, 절대”라고 읊조렸다고 전했다.
이날 회견은 날선 분위기 없이 진행됐고 이후 트럼프 대통령도 카니 총리를 칭찬했다. 그는 “긴장 없는 훌륭한 만남이었다”고 언론에 말했다.
● 충분한 사전 교감과 국방비 선물
메르츠 총리가 선방한 배경으로는 트럼프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가 꼽힌다. WP는 “메르츠와 트럼프가 여러 차례 주고 받은 전화 통화가 원활한 회의를 위한 길을 열어줬다”고 전했다. 독일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국방비 증액’이라는 선물도 준비했다. 메르츠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독일이 국방비 지출 증대를 위해 재정 규칙을 변경한 점을 강조한 것으로 전해졌다. 사전에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조성한 덕분에 양국간 민감한 주제가 언급되지 않았다는 분석도 있다. 바로 독일의 극우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다. 독일 정보기관은 AfD를 극우 극단주의 조직으로 지정했다. 이에 머스크 CEO와 밴스 부통령 등이 강하게 반발하며 AfD를 지지했다. 메르츠 총리는 내정 간섭을 경고했고 이는 양국간 긴장 요소로 떠올랐다. 그러나 이번 방미 기간 공개 석상에서 AfD 문제는 다뤄지지 않았다.
회담 직후 메르츠 총리는 인스타그램에 “분위기가 매우 좋았다”며 “이제 언제든지 전화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고 만족감을 드러냈다. 트럼프 대통령 역시 “어렵지만 상대하기 좋은 인물”이라며 메르츠 총리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의 답방도 조만간 성사될 전망이다. 메르츠 총리는 독일 방송 ARD에 트럼프 대통령이 베를린 초청을 수락했고, 이를 준비 중이라고 전했다. 트럼프의 조부의 고향인 칼슈타트를 방문 일정에 포함하겠다고도 말했다.
왼쪽부터 린지 그레이엄 상원의원, 메르츠 총리, 리처드 블루먼솔 상원의원, 크리스 쿤스 상원의원. 워싱턴=AP 뉴시스
쥐스탱 트뤼도 전 캐나다 총리의 수석보좌관 출신인 브라이언 클라우는 폴리티코에 트럼프 대통령 대응 전략의 대전제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건 트럼프의 쇼다. 그가 주도하도록 내버려둬야 한다.”
27화 요약: 독일 메르츠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과의 백악관 기자회견에서 단 4분 발언했지만 “미국이 우크라이나 종전을 위한 노력에 동참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정확히 전달해 선방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트럼프식 ‘WWE 기자회견’에 대비해 각국 정상들은 전화통화 등 사전 교감에 힘쓰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주도권을 쥐도록 두되 하나의 핵심 메시지를 단호하게 강조하는 전략이 효과를 보고 있다.
동아일보가 아카이빙한 미니 히어로콘텐츠 ‘트럼프 2.0 폴리시 맵’에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주요 정책을 한 눈에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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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윤 기자 asa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