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황성호]기준도 없이 처벌만 강화한… 약물운전 입법공백의 불합리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6월 15일 23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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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호 사회부 기자
황성호 사회부 기자
최근 방송인 이경규 씨(65)의 ‘약물 운전’이 논란이 됐다. 이 씨는 병원에서 처방 받은 공황장애 약을 먹고 운전을 했다. 경찰은 처방 받은 약이더라도 그 영향으로 정상적으로 운전하지 못할 때 운전대를 잡으면 도로교통법 위반이라고 했다. 사건은 현재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의 정밀감정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적지 않은 시민들이 이번 사건을 계기로 “나도 약물 운전으로 처벌 받는 것 아니냐”며 불안해하고 있다.

이런 불안감은 약물 운전이 우리 일상생활과 맞닿아 있어서다. 공황장애뿐만 아니라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등에 쓰이는 약을 복용하고 운전해도 같은 상황에 놓일 수 있다. 이러한 질환을 앓는 사람들은 가파르게 늘고 있다. 우울증으로 치료를 받은 환자가 100만 명을 넘은 것이 벌써 2022년이다. 2018년 75만 명 선에서 4년 새 약 33% 폭증했다. 2017년 13만 명 정도였던 공황장애 환자도 불과 4년 만인 2021년 20만 명을 넘어섰다. 하다 못해 건강검진에서 수면내시경을 한 뒤 운전하더라도 약물 운전 혐의로 처벌받을 가능성이 있다. 약물 운전이 내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 셈이다.

이 때문에 처벌에 대한 원성도 적지 않다. “아파서 처방 받은 약을 먹고 운전한 것인데 과도한 처벌 아니냐”는 것이다. 택시 기사나 대형 트럭 운전사같이 운전이 생업인 사람들은 공황장애나 우울증에 걸리면 일을 그만둬야 할 수도 있다. 일견 이해가 가는 주장이다.

다만 약물 운전의 위험성을 간과해선 안 된다. 이달 1일 법원은 수면제를 복용한 채 운전하다가 1명을 숨지게 하고 7명을 다치게 한 운전자에게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수면내시경 후 충분히 자신의 몸이 회복됐다 여기고 혼자 차를 운전해 집에 왔는데, 나중에 보니 어떻게 운전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는 환자들도 있다고 한다. 음주 운전, 마약 운전만큼이나 약물 운전도 위험한 것이다. 행정부와 입법부가 시민의 일상과 처벌 사이에서 현명한 대책을 내놓아야 하는 까닭이다.

약물 운전에 관련된 현행 법에는 공백이 많다. 한국은 금지 약물을 먹은 뒤 언제부터 운전이 가능한지 규정이 없다. 해외는 다르다. 영국과 독일은 해당 약물 복용 후 ‘24시간 뒤’ 운전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호주는 ‘12시간 동안’ 운전을 하지 못하도록 한다. 올해 4월부터 약물 운전에 대한 법정 최고형이 징역 3년에서 징역 5년으로 높아졌지만 운전 가능 시간 등을 규정하는 조항은 여전히 없다. 범법자만 양산하는, 정교하지 못한 법이다.

음주 운전의 경우 1962년 도로교통법 시행령이 적용되며 처음 단속 기준이 생겼다. 그해 국내 자동차 수는 불과 1만1449대. 인구 10만 명당 4대 꼴이었다. 경부고속도로가 만들어지기 8년 전에 이미 음주 운전 단속 세부 조항이 마련된 셈이다. 지금 약물 운전의 사정은 어떤가. 국내 우울증 환자는 인구 10만 명당 1944명(2022년 기준)이다. 우울증 약을 복용하는 사람도, 그러고도 운전을 하는 사람도 빠르게 늘고 있다. 입법이 늦어도 너무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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