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길 번진 뒤에야 재난문자…아무 차나 붙잡고 어르신들 태워”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3월 26일 17시 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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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불 현장 탈출 주민들 “짐도 못 챙기고 몸만 빠져나와”
불길 피해 달아났더니 바닷가…낚싯배까지 동원해 구조

지난 22일 경북 의성군에서 시작된 산불이 강풍을 타고 영덕군까지 확산된 26일 오후 한 주민이 불에 탄 집을 쳐다보고 있다. 2025.3.26/뉴스1
“시골에 살아서 어릴 때부터 산불은 많이 겪었지만 이런 산불은 처음입니다. 마치 화산이 폭발하는 것처럼 굉음과 함께 불덩이가 비닐하우스와 집을 덮쳤고 겨우 몸만 빠져나와 마을회관 쪽으로 도망쳤습니다”

26일 경북 영양군 석보면 화매2리 마을회관. 주민 황호진 씨(66)는 불에 까맣게 타버린 집을 바라보며 연신 눈물을 훔쳤다. 화마에서 가까스로 살아나온 사람들은 참담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경북 의성 산불이 번진 석보면에서는 여러 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연기와 화염에 뒤덮인 마을을 가까스로 빠져나온 주민들은 “평생 처음 보는 산불”이라며 당시의 참혹한 순간을 전했다.

경북 의성 산불이 강풍을 타고 영덕으로 확산된 26일 오전 영덕읍 매정 1리 마을에서 주민이 주택에 님아 있는 불을 끄고 있다. 2025.3.26/뉴스1
이번 산불로 전국 2만7000여 명이 대피한 가운데 경북 청송시 주민들도 가까운 대피소로 몸을 피했다. 청송시 파천면에 사는 김미외 씨(62)는 “창밖을 보니 약 200m되는 거리 앞산에 불길이 하늘을 찌를 듯이 솟고 있었다. 깜짝 놀라 내복 차림으로 뛰쳐나오다가 미끄러져 왼쪽 다리를 크게 다쳤다”고 말했다.

25일 밤 산불은 산맥을 넘어 동해안 해안가 경북 영덕까지 번졌다. 불길을 피해 방파제로 달아난 주민들은 바다와 불길 사이에 고립됐다. 울진해양경찰서는 방파제와 해안가 등에 갇힌 104명을 구조했다. 구조에는 낚시 어선 등 민간 선박도 동원됐다. 또 다른 마을에선 주민 9명이 한 차량에 타 급히 탈출을 시도했지만 뜨거워지 도로 표면 탓에 타이어가 터지면서 차가 도로 한복판에 멈춰섰다. 이들은 불길과 연기를 피해 인근 하천에 몸을 던져 물 속에서 버티다 지나가던 경찰에 구조돼 목숨을 건졌다.

26일 오후 경북 영양군 입암면 방전리 일대 야산에서 불이나 의용소방대원들이 산불 진화를 하고 있다. 2025.3.26/뉴스1
이번 화재에서 재난문자가 제때 도착하지 않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일부 지역에서는 화재를 알리는 재난문자가 불길이 이미 마을에 번진 뒤에야 도착한 곳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몇몇 마을에서 이장과 주민들이 동네 노인들을 일일이 찾아가 대피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렸다. 화매1리 이장 김모 씨는 “마을 여기 저기 불이 붙기 시작한 뒤에야 재난문자가 도착했다”고 했다. 그는 “불길을 본 뒤 마을에 대피방송을 2번 했다”며 “마을에 불이 붙은 뒤에야 면사무소에서 직원의 대피 요청과 재난문자가 도착했다”고 밝혔다. 다른 주민도 “문자가 (화재가 덮친) 뒤늦게 많이 왔다. 문자보단 뉴스로 산불 소식을 주로 접했다”고 말했다.

의성군 관계자는 “(행정) 직원이 직접 (어르신들을) 모시고 나올 상황이 못돼 이장을 포함한 동네 지도자, 부녀회, 젊은 사람들이 주도해 대피를 도왔다”고 설명했다. 일부 노인들은 스스로 대피했다. 석보면에서 만난 김숙자 씨(84)의 경우 화재로 갑자기 정전이 돼 TV도 꺼져 약만 챙겨 혼자 걸어나와 동네 주민 차를 빌려 타고 대피소로 이동했다. 김 이장은 “가까운 집부터 어르신 집까지 찾아다니면서 집집마다 불러내 대피소로 이동시켰다”며 “눈 앞에 다니는 차를 무조건 붙잡아 세워두고 어르신들을 태워드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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