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 정책에 대한 우려가 1930년 스무트-홀리법(Smoot-Hawley Act)을 소환했다. 미국 20세기 최악의 법 중 하나로 흔히 거론되는 스무트-홀리 법에 대해서는 더글라스 어윈 다트머스대학 경제학부 교수가 쓴 ‘Peddling Protectionism(보호무역주의 퍼트리기·2011)’이 일목요연하고 상세히 다루고 있다. 책 제목은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이자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인 폴 크루그먼의 ‘Peddling Prosperity·1994’와 유사성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경제학의 향연’으로 본래 뜻과 동떨어지게 번역됐지만 직역하면 ‘번영(繁榮) 퍼트리기’다.
일단 스무트-홀리법이 1930년대 대공황의 원인인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오해다. 그러나 그런 오해는 미국 밖에서 미국 사정을 잘 몰라서 생긴 것이 아니라 스무트-홀리법이 미국 내에서 악명을 떨치면서 생긴 것이다.
스무트-홀리법은 1929년 10월 미국 뉴욕 주식시장의 대폭락 이후인 1930년 3월에 통과됐다. 단지 시기적으로 주식시장 대폭락보다 늦을 뿐 아니라 스무트-홀리법에 따른 관세 인상율은 그 자체로는 이전 시기의 관세 인상율보다 높지 않았다. 무엇보다 조세의 한 분야일 뿐인 관세는 대공황과 같은 경기 침체를 몰고 오기에는 너무 작은 요인이다. 대공황은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의 분석대로 당시의 금융경색 상황에서 중앙은행의 부재로 인한 화폐공급의 부족이 악순환을 일으키며 빚어진 현상으로 정리됐다.
그렇다고 해서 스무트-홀리법이 대공황 시기의 경기 침체와 관련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스무트-홀리법이 통과된 때는 1930년이지만 주식시장의 대폭락 이전에 법 제정이 확실시되고 있었기 때문에 시기적인 선후를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또 스무트-홀리법에 따른 관세 인상율은 그 자체로는 높지 않았지만 경기 침체로 인해 물가가 전반적으로 하락하는 가운데 역시 같이 하락하는 수입품 물가에 대비해서 보면 상대적으로 매우 높았다.
관세 개정법이라면 스무트-홀리법만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기 쉽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미국은 남북전쟁 이후 10년 정도마다 관세법을 개정해왔다. 1913년 소득세가 도입되면서 관세는 더 이상 연방정부의 주요한 세입원이 되기를 그쳤다. 그러나 미국 국내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특정 분야의 관세 인상은 계속됐다. 스무트-홀리법 제정 6년 전에도 포드니-맥컴버(Fordney-McCumber) 관세법이 제정됐다. 포드니-맥컴버법에 따른 관세 인상율이 스무트-홀리법에 따른 관세 인상율보다 더 높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스무트-홀리법만 기억되는 것은 포드니-맥컴버법 시행때는 경기 상승 시기여서 관세 인상의 파급 효과가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기 침체(그에 따른 물가 하락) 때의 관세 인상은 경기 상승(그에 따른 물가 상승) 때의 관세 인상에 비해 훨씬 큰 체감과 파급효과를 낳는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 스무트-홀리법이다.
●미국에 부메랑으로 돌아온 스무트-홀리법
그러나 스무트-홀리법의 더 큰 폐해는 오히려 다른 데 있다고 할 것이다. 미국의 관세 인상은 주요 교역국에 적대감을 불러일으켜 주요 교역국이 미국에 보복관세를 부가하게 하고 수입선을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로 돌리게 함으로써 미국의 수출을 크게 감소시켰다.
당시 미국의 주요 교역국은 이웃한 캐나다와 대서양을 사이에 둔 유럽의 국가들이었다. 캐나다는 전체 수출의 43%가 대미(對美) 수출일 정도로 미국과의 상호의존도가 가장 높은 나라였다. 당시 캐나다는 친미(親美) 노선의 자유당이 집권하고 있었다. 1930년 5월 캐나다 총선에서 통과가 확실시되는 스무트-홀리법이 주요 쟁점이 됐다. 자유당은 미국 제품에 이전보다 높은 관세를 부과하고 그 대신 영국과 영연방 국가들로부터의 수입품에 대한 관세를 낮췄음에도 여전히 대응이 무르다는 비판을 받아 친영(親英)노선의 보수당에 패배했다.
1931년 금융위기가 미국에서 유럽으로 퍼지면서 유럽에서도 무역장벽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영국은 이해 9월 금본위제를 폐기하고 파운드화의 평가절하를 용인했다. 파운드화의 평가절하는 세계 시장에서 영국 제품의 가격 경쟁력이 높아지면서 다른 한편으로 영국 내 수입품 가격이 인상돼 수입이 줄어드는 것을 뜻한다. 프랑스 등 다른 나라들은 파운드화의 평가절하를 상쇄하기 위해 영국 제품에 추가 관세를 부가하거나 수입 쿼터를 배정함으로써 대응했다. 영국이 이에 한술 더 떠 그동안 유지해온 자유무역주의 노선을 폐기하고 보호무역주의로 돌아섰다. 일반 관세 10%를 부과하고 정부에 특정 품목에 대해 100%까지 관세를 올릴 수 있는 재량을 부여한 것이다. 이로 인해 영국에 면세로 들어오는 미국 제품의 비율은 1930년 70%에서 이듬해 20%로 떨어졌다.
미국이 스무트-홀리법을 통과시키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경제와 금융 위기의 결과로 보호무역정책이 확산됐을 것이다. 그렇다고 스무트-홀리법이 미국 경제에 미친 해악의 책임이 면제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스무트-홀리법은 차별적 무역정책의 확산에 영향을 미쳤고 특히 차별적 무역정책의 타깃이 미국이 됐기 때문이다.
1932년 영국과 캐나다 등 영연방국가들은 상호간에 제국 특혜(imperial preference)를 부여해 일반 관세 10%를 면제했다. 이로 인해 캐나다와 미국 사이에 이뤄질 교역의 일부가 캐나다와 영국 사이로 옮겨가면서 미국 수출의 5~13%가 줄어들었다.
영국과 영연방국가만 미국에 대해 차별적 무역정책을 쓴 것이 아니다. 독일이 외환 통제(exchange control), 수입 허가(import licensing), 남유럽 국가와의 상호면세협정 체결 등을 시행하면서 미국으로부터의 수입의 비율이 1928년 15%에서 1935년 6%로 떨어졌다. 프랑스에서도 수입쿼터 등이 시행돼 미국으로부터의 수입의 비율이 같은 기간 12%에서 9%로 떨어졌다.
스무트-홀리법은 공화당 정치인으로 이 법의 통과를 주도한 리드 스무트 상원의원과 윌리스 홀리 하원의원의 이름을 따 지은 것이다. 스무트-홀리법은 의회 논의 때부터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 평가에는 logrolling(정치적 결탁), pork barrel(선심성 공약) 같은 단어들이 오갔다. 시행 후에는 더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나중에 뉴딜 정책의 비판자로 이름이 높았던 섬너 슬리크터(Sumner Slichter) 하버드대 경제학 교수는 1932년 ‘관세는 대공황의 원인인가’라는 논문에서 스무트-홀리법을 “거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어리석은 조치”라고 평했다.
당시 경기가 상승기로 돌아섰다면 스무트-홀리법이 관세가 높아진 농업 분야에서 자국 농민 보호를 위해 어느 정도 긍정적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얻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공황은 해가 갈수록 심화되고 스무트-홀리법에 대한 평가도 악화되기만 했다.
1932년 대공황의 와중에 열린 대선과 총선에서 공화당이 몰락했다. 민주당의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대통령이 되고 하원도 민주당 차지가 되면서 민주당의 전통적인 저(低)관세주의가 힘을 얻기 시작했다. 1934년 대통령이 다른 나라와 관세를 협상할 수 있는 상호무역협정법(RTAA)이 통과됐다. RTAA는 대통령에게 50%까지 관세를 인상하거나 인하할 수 있는 권한을 줬을 뿐 아니라 관세 조정의 주도권을 의회에서 대통령으로 옮기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공화당은 RTAA에 만장일치로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관세 조정에 대해 대통령이 너무 많은 재량권을 갖는 걸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화당조차도 스무트-홀리법의 악몽을 겪으면서 의회가 관세율을 결정하는 걸 주저하게 됐다. 의원의 이름을 딴 관세법은 스무트-홀리법이 마지막이 됐다. 미국에서 대통령이 관세 협상의 주도권을 쥐고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거나 트럼프처럼 광란의 관세 인상을 할 수 있는 계기는 RTAA에까지 소급한다.
미국 정부는 1930년대 많은 나라와 관세 인하를 위한 무역협정을 체결했다. 그 정점이 1947년 관세무역일반협정(GATT)의 체결이다. GATT의 지도이념은 최혜국(most favored nation)대우로 미국이 스무트-홀리법의 여파로 받았던 차별적 대우도 사라지게 됐다. GATT는 1995년 출범한 세계무역기구(WTO)의 모태가 됐다.
제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유럽 경제가 몰락하고 미국이 압도적인 생산국이 되면서 1950년대와 1960년대 미국은 수입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 나라가 됐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유럽 경제가 살아나고 일본이 부흥하면서 이들 국가가 주요 생산국이 되자 다시 미국과의 무역 갈등이 빚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스무트-홀리법의 악몽이 소환돼 수입 제한 압력을 물리쳤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4월 2일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관세율 차트를 들고 설명하고 있다. 저자가 이 책을 쓴 동기는 스무트-홀리법이 다시 돌아올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책은 트럼프의 취임과는 상관없이 쓰여졌다. 그보다는 2008년 금융위기와 이듬해 대침체(Great Recession)를 겪고 나서 1930년대 대공황 때처럼 다시 보호무역주의가 등장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2011년 쓰여졌다.
저자는 1930년대와 오늘날은 상황이 많이 다르다고 본다. 1930년대만 하더라도 미국에서 수입 농산물로 위기에 처한 자국 농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관세 인상 외에 보조금 지급 등의 다른 대안이 없었다. 1930년대에는 미국 경제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국내총생산 대비 5%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13%에 이르기 때문에 보호무역주의는 미국 경제에 당시보다 더 큰 타격을 줄 수 있다. 스무트-홀리법을 시행할 때만 하더라도 환율체제가 고정적이었으나 이후의 변동 환율체제가 도입돼 미국이 관세를 인상하면 다른 나라가 환율을 높여 관세 인상을 상쇄할 수 있게 됐다.
●트럼프는 스무트-홀리법의 교훈 잊지 말아야
그러나 2017년 1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재앙이라고 부르고 환태평양동반자협정(TPP)의 폐기를 공언한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했다. 저자는 2017년 5월 자신의 책을 페이퍼백으로 출간하면서 쓴 서문에서 “어디선가 스무트 씨와 홀리 씨가 웃고 있을지 모른다”며 트럼프의 무역 정책을 우려했다.
트럼프는 말로 위협하는 것(bluffing)을 자기 뜻을 관철하는 수단으로 삼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가 세게 질러놓고는 있지만 어떻게 마무리될지 아직 알기 어렵다. 일단 영국과의 관세 협상이 타결됐는데 일반 관세 10%는 유지되고 시장 개방을 조건으로 품목별 관세는 낮아지는 것으로 나왔다. 트럼프가 애초 위협한 것보다는 완화된 결과여서 시장에서는 다소 안도하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그러나 트럼프의 관세 전쟁은 1980년대 플라자협정으로 일본을 주저앉힌 것처럼 중국의 추격을 따돌리려는 목적도 있어 관세 인상이 수출 통제와 뒤섞이는 등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중국을 비롯한 각국과의 협상 결과가 나와 봐야 전모를 알 수 있겠지만 향후 전개에 따라서는 미국이 세계 경제, 나아가 세계 정치의 주도권을 상실하는 결정적 계기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댓글 0